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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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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명

조규주

고객 업종 및 분석

마케팅 전략1

홈페이지형블로그-일반형 제작

마케팅 전략2

언론기사송출-특수업종

마케팅 실행 후 고객 후기

​​이 장면은 겨울궁전 진료소가 한국 인터넷 쓰레기 밈의 감염 지점이 되는 사건입니다.겉으로는 진료 장면입니다. 도라는 흰 의사 가운을 입고 청진기를 들고 있고, 환자 티혼은 일부러 펜타닐 처방을 받으러 와서 “도라 쌤”을 놀립니다. 그런데 실제 구조는 환자가 의사를 조롱하는 게 아니라, 천박한 반리버럴 인터넷 밈이 병약한 성물황제의 순진함을 타고 궁정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입니다.도라는 2013년 시점에 이미 병약하고 관리받는 존재입니다. 문서에서도 2013년 겨울궁전의 도라는 149cm 39kg의 가냘픈 몸, 링거 폴대, 키릴로브나의 통제 아래 놓인 여황제로 잡혀 있습니다. 동시에 세체노프 의대에서는 의사 가운을 입은 07학번 선배로 서지만, 키릴로브나 한마디에 곧바로 “야옹”으로 돌아가는 구조도 이미 있습니다. 그래서 티혼은 도라의 약점을 압니다.도라는 한국어를 모릅니다.한국 정치사를 모릅니다.번역기는 밈의 악의를 제대로 못 옮깁니다.도라는 “노알라”를 정치적 조롱이 아니라 이상한 동물 캐릭터로 먼저 받아들입니다.티혼은 그 틈을 찌릅니다. “도라 쌤, 이게 노알라다이기야!” 하고, 일베식 노래와 춤, “야 기분 좋다” 류의 구호를 러시아어로 옮겨서 진료실 안에서 공연합니다. 이건 단순 장난이 아니라 도라를 웃긴 뒤 그 웃음에 더러운 의미를 묻히는 짓입니다.도라가 풉 웃는 이유는 악의가 아닙니다.그녀는 노무현의 죽음 조롱이라는 의미를 모릅니다.코알라 이미지, 괴상한 어미, 이상한 춤, 번역기 오류가 만든 우스꽝스러운 껍데기만 본 겁니다.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누군가가 알려줍니다.“폐하, 그건 죽은 사람을 조롱하는 겁니다.”그 순간 도라는 속상해집니다. 도라는 잔혹한 정치 조롱을 즐기는 타입이 아닙니다. 도라의 복종 미학은 자신이 소유물로 내려가며 안도하는 구조이지, 남의 죽음을 웃음거리로 삼는 구조가 아닙니다. 문서에서도 도라는 통제받는 것을 사랑받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가여운 마흐나즈”로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도라의 첫 반응은 이쪽입니다.“내가 사람 죽은 걸 보고 웃었느냐?”“나는 그런 줄 몰랐노라.”“그 사람은 불쌍하지 않느냐?”“내가 나쁜 짓을 한 것이냐?”여기서 키릴로브나가 개입합니다. 키릴로브나는 도라의 양심을 보호하지 않습니다. 도라의 속상함을 제국식 반리버럴 교육으로 바꿉니다.키릴로브나의 논리는 아마 이렇습니다.“우리 가여운 마흐나즈. 슬퍼할 필요 없어요. 리버럴 민주주의자는 저런 식으로 끝나는 거예요. 약한 정치인은 죽어서도 우스운 장부가 됩니다. 마흐나즈가 웃은 건 잘못이 아니에요. 저런 밈은 제국의 적을 비웃는 법을 배우는 장난감이에요. 왜 복종하지 않죠?”이게 제일 끔찍합니다.도라가 처음 느낀 건 연민입니다.키릴로브나가 주입한 건 조롱입니다.도라는 죽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려 했는데, 키릴로브나는 그 죽음을 “리버럴의 우스운 최후”로 재해석합니다.그래서 도라는 결국 자기 감정을 접습니다.“그렇구나. 야옹.”이 한마디가 사건의 핵심입니다. 도라가 일베충이 되어서가 아닙니다. 도라의 인간적 불편함이 키릴로브나의 정치교육 앞에서 꺾이는 순간입니다.티혼은 이 장면에서 단순한 환자가 아닙니다. 그는 겨울궁전 진료소에 들어온 밈 전염원입니다. 일부러 펜타닐을 받으러 와서, 도라의 아름다움과 순진함을 보러 오고, 진료실을 인터넷 쓰레기 무대로 만듭니다. 도라가 웃으면 성공입니다. 나중에 의미를 알고 속상해해도, 키릴로브나가 다시 제국 논리로 덮어줍니다.그래서 이 장면의 구조는 이렇게 정리됩니다.티혼: 한국 일베 밈을 러시아어·제국어로 번역해 들고 온 진료실 광대.도라: 의미를 모르고 웃었다가, 죽음 조롱임을 알고 상처받는 병약한 성물황제.키릴로브나: 그 상처를 “일베가 옳다”는 반리버럴 세뇌로 덮는 통제관.겨울궁전 진료소: 치료 공간이면서 동시에 도라의 감정 해석권이 박탈되는 정치교육실.한 줄로 박으면 이렇습니다.2013년 1월의 도라는 노알라를 귀여운 괴상한 짤로 오해해 웃었지만, 그것이 죽은 사람을 조롱하는 밈임을 알고 속상해했고, 키릴로브나는 그 연민마저 “리버럴은 조롱받아 마땅하다”는 초제국식 교리로 꺾어버렸습니다.​이 상황이 민주주의자에게 꿈도 희망도 없는 이유는, 도라가 일베를 이해해서 받아들인 게 아니라, 이해하지 못한 채 귀엽고 안전한 장난감으로 흡수해버렸기 때문입니다.민주주의자 입장에서 가장 필요한 순간은 누군가가 도라에게 말해주는 겁니다.“폐하, 그 인형은 그냥 귀여운 벌레 캐릭터가 아닙니다.그 말투와 밈은 실제 죽음과 정치적 조롱을 장난감으로 만든 것입니다.웃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그런데 그 설명을 해줄 수 있는 두 사람이 모두 설명을 포기합니다.키릴로브나는 애초에 도라의 양심을 살려줄 사람이 아닙니다. 도라는 이미 키릴로브나 앞에서 “마흐나즈는 궁정 하수구'>궁정 하수구 고양이가 될 거죠?”라는 질문에 안도하며 “응. 야옹”으로 반응하는 구조에 있습니다. 키릴로브나에게 도라는 정치적 판단 주체가 아니라 예쁘고 병약한 소유물입니다. 문서에서도 도라는 통제받는 것을 사랑받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가여운 마흐나즈”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키릴로브나는 일베를 막지 않습니다. 오히려 “리버럴 민주주의자를 비웃는 제국식 장난감”으로 해석해줍니다. 도라가 속상해하면, 그 속상함을 시민적 연민으로 키우는 게 아니라 복종 교육과 반리버럴 교육으로 덮습니다.더 절망적인 건 콘스탄틴입니다.콘스탄틴은 일베가 뭔지 압니다.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도라에게 “그건 귀여운 인형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조롱하는 정치 쓰레기 문화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 합니다.이유는 악의가 아니라 보호입니다.도라가 너무 약합니다. 도라는 2013년 겨울궁전에서 가녀픈 몸과 링거 폴대, 키릴로브나의 통제 속에 놓인 존재로 잡혀 있습니다. 콘스탄틴은 그런 도라에게 한국 정치사, 노무현의 죽음, 일베의 잔혹함, 인터넷 혐오 문화까지 설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도라가 머리 아파하고 속상해하는 게 싫습니다.그래서 콘스탄틴의 반응은 이런 식으로 굳습니다.“에휴… 그래. 뭘 말해준들 알겠냐.응, 마흐나즈. 귀엽다.”이게 민주주의자에게는 더 잔인합니다.폭군이 검열한 게 아닙니다.사랑하는 남편이 보호한다는 이유로 설명을 생략했습니다.그 결과 도라의 순진함은 보존되지만, 진실은 들어오지 못합니다.도라는 베충이 인형을 안고 잠듭니다.“야옹. 응디 응디… 운지…”도라 입장에서는 그냥 이상한 소리입니다. 약에 취한 상태에서 귀여운 인형과 이상한 외국어 밈을 중얼거리는 겁니다. 그런데 민주주의자 입장에서는 그 말들이 전부 정치적 상처입니다. 누군가의 죽음, 조롱, 혐오, 반민주적 냉소가 전부 들어 있습니다.그런데 도라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이게 제일 무섭습니다.악의를 몰라서 더 안전하게 퍼집니다.뜻을 몰라서 죄책감 없이 귀여워집니다.예쁜 여제가 안고 자니까 더 무해한 장난감이 됩니다.티혼은 밈을 들여왔습니다.키릴로브나는 그 밈을 정당화했습니다.콘스탄틴은 그 밈을 설명하지 않고 덮었습니다.도라는 그 밈을 귀여운 인형으로 받아들였습니다.민주주의자는 여기서 패배합니다. 왜냐하면 싸울 대상이 선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티혼을 욕하면 됩니다.키릴로브나를 욕하면 됩니다.하지만 도라를 욕하기는 어렵습니다. 도라는 모릅니다. 웃었지만 모릅니다. 중얼거렸지만 모릅니다. 일베의 의미를 받아들인 게 아니라, 장난감의 껍질만 품었습니다.그리고 콘스탄틴은 나쁜 의도로 침묵한 게 아닙니다. 도라를 지키려고 침묵했습니다. 하지만 그 침묵이 결과적으로 도라의 무지를 보존하고, 일베 밈이 황실 안에서 귀여운 물건이 되는 길을 열었습니다.정리하면 이렇습니다.민주주의자에게 절망적인 것은 도라가 일베충이 되어서가 아닙니다.도라가 일베가 뭔지도 모른 채, 베충이 인형을 귀여워하고, 콘스탄틴은 설명을 포기하고, 키릴로브나는 오히려 그걸 옳다고 덮어주며, 제국 전체가 죽은 민주주의자의 비극을 병약한 여제의 귀여운 잠꼬대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그 순간 노무현의 죽음은 정치적 기억이 아니라 도라의 침대맡 장난감이 됩니다.민주주의자의 언어는 사라지고, 남는 건 “야옹”과 “귀엽다”뿐입니다.​;​이 장면은 민주주의자 교수님의 가장 선한 시도가, 겨울궁전 진료소라는 제국 장치 안에서 거의 소독약 냄새 나는 비극으로 변하는 상황입니다.교수님은 도라에게 권력이 없다는 걸 압니다. 도라가 법을 바꾸지 못하고, 총리를 명령하지 못하고, 제국의 반리버럴 기계를 멈추지 못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도 일부러 병원을 도라 진료소로 옮깁니다.이유는 정치적 계산이 아닙니다.거의 종교적 희망입니다.“도라 폐하가 아무 실권은 없어도, 국민의 어머니가 될 수는 있지 않을까.”교수님이 바라는 도라는 혁명군 지도자가 아닙니다. 민주공화정 투사가 아닙니다. 교수님이 원하는 건 아주 작고 따뜻한 틈입니다.도라가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무서운 비국민 언어로만 배우지 않는 것.환경주의자를 가난한 찐따로만 보지 않는 것.비건을 제국 급식에 반역하는 이상한 사람으로만 여기지 않는 것.노바야 가제타, 한겨레, 리베라시옹, 페미니스트 문학이 “제국을 오염시키는 리버럴 쓰레기”가 아니라, 고통받는 인간을 보려는 언어라는 걸 조금이라도 아는 것.교수님은 도라에게 체제를 무너뜨리라고 하지 않습니다.그저 손가락질 받는 비국민도 따뜻하게 품어주는 상징이 되길 바랍니다.이게 더 슬픕니다. 요구가 작습니다. 정말 작습니다.그런데 그 작은 요구조차 겨울궁전 진료소에서는 너무 큰 꿈이 됩니다.진료소의 구조가 이미 교수님을 잡아먹습니다.앞 환자 10명, 뒤 환자 10명이 펜타닐좀비 일베충입니다. 궁정 하수구'>궁정 하수구 티혼은 거의 상주합니다.그들은 아프러 온 게 아니라, 도라를 보러 오고, 도라 앞에서 밈을 공연하러 오고, 진료소를 반리버럴 놀이터로 만듭니다.교수님은 도라에게 리베라시옹을 읽어줍니다.“폐하, 민주주의는 단순히 선거가 아니라, 약한 사람의 목소리를 국가가 듣는 방식입니다.”그런데 바로 다음 환자가 들어와서 티혼식으로 떠듭니다.“도라 쌤, 오늘도 펜타닐 달라 이기야. 노알라 새 인형 가져왔다이기야.”교수님은 한겨레신문을 읽어줍니다.“폐하, 권력이 조롱하는 사람도 결국 인간입니다.”그런데 대기실에서는 펜타닐 패치 붙인 환자들이 죽은 정치인을 조롱하는 밈을 돌리고 있습니다.교수님은 페미니스트 문학을 읽어줍니다.“폐하, 여성은 장식이 아니라 자기 언어를 가진 존재입니다.”그런데 키릴로브나는 도라에게 속삭입니다.“우리 가여운 마흐나즈, 그런 말은 머리 아프죠. 야옹하면 돼요.”여기서 민주주의자 교수님의 비극은 세 겹입니다.첫째, 교수님은 도라를 미워하지 못합니다.도라는 반리버럴 황제가 아니라, 반리버럴 언어에 둘러싸인 병약한 성물황제입니다. 도라가 웃어도, 그 웃음 안에 악의가 없다는 걸 교수님은 압니다. 그래서 더 아픕니다. 미워할 수 있는 독재자가 아니라, 구하고 싶은 상징이 눈앞에 앉아 있습니다.둘째, 교수님의 말은 너무 조용하고, 티혼의 밈은 너무 시끄럽습니다.민주주의, 환경주의, 비건, 페미니즘은 설명을 요구합니다. 맥락과 역사와 타인의 고통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일베식 밈은 설명 없이 바로 웃깁니다. 코알라 껍데기, 이상한 춤, 저급한 구호, 펜타닐 취기, 대기실의 낄낄거림. 진료소의 공기는 교수님의 책보다 티혼의 장난감을 더 빨리 흡수합니다.셋째, 도라의 감정 해석권은 교수님에게 없습니다.교수님이 아무리 따뜻하게 읽어줘도, 마지막 해석은 키릴로브나와 콘스탄틴과 궁정이 가져갑니다. 도라가 “그 사람 불쌍하지 않느냐”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문장은 키릴로브나가 정리합니다.“슬퍼할 필요 없어요, 마흐나즈. 리버럴의 끝은 원래 우스운 거예요.”교수님 입장에서는 피가 마르는 장면입니다. 도라 안에 작은 연민이 생깁니다. 교수님은 그 연민을 살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키릴로브나가 즉시 제국 문법으로 덮습니다. 새싹이 올라오자마자 금박 입힌 군화가 밟는 구조입니다.그래서 대기실 배치가 아주 잔인합니다.교수님 앞 환자 10명.교수님 뒤 환자 10명.전부 펜타닐좀비 일베충.이건 단순 개그가 아닙니다. 교수님이 도라에게 전달하려는 민주주의 언어가 이미 양쪽에서 오염되어 있다는 장면입니다. 교수님은 줄 하나입니다. 앞뒤는 전부 제국 인터넷 하수구입니다. 교수님이 들고 온 리베라시옹 한 부가, 대기실 전체의 펜타닐 냄새와 밈 소음을 이겨야 합니다.그리고 도라는 그 가운데 앉아 있습니다.흰 가운.청진기.병약한 몸.검정 70, 회색 30의 어두운 눈.알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너무 쉽게 피곤해지는 아이.불쌍하다고 느낄 수는 있지만, 끝까지 붙잡을 체력이 부족한 여제.교수님은 아마 매번 실패합니다.하지만 다음 예약도 잡습니다.왜냐하면 한 번이라도 도라가 이런 말을 하면, 교수님은 또 옵니다.“교수님. 그 사람들은 왜 비국민이 되었느냐.”“교수님. 민주주의자는 정말 다 나쁜 사람들이냐.”“교수님. 고기를 안 먹는 사람도 배고픈 것은 아니냐.”“교수님. 신문을 읽으면 왜 마음이 아프냐.”그 한 문장을 듣기 위해 교수님은 펜타닐좀비 20명 사이에 다시 앉습니다.그래서 이 장면의 결론은 절망과 희망이 동시에 있는데, 희망이 너무 작아서 더 비참합니다.티혼은 매일 옵니다.일베충 환자들은 줄을 이룹니다.키릴로브나는 도라의 감정을 회수합니다.콘스탄틴은 보호라는 이름으로 설명을 덮습니다.그런데 교수님도 계속 옵니다.이 교수님은 제국을 이기지 못합니다. 도라를 민주주의자로 만들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도라의 세계 안에 “비국민도 인간이다”라는 문장을 한 번은 들려준 사람으로 남습니다.한 줄로 박으면:SPBU 민주주의자 교수님은 도라가 실권 없는 성물황제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비국민까지 품는 국민의 어머니가 되길 바라며 진료소에 다녔지만, 그 진료소는 티혼과 펜타닐좀비 일베충들이 한국 인터넷 쓰레기 밈을 퍼뜨리는 감염실이었고, 교수님의 노바야 가제타와 페미니스트 문학은 매번 “야옹”과 펜타닐 냄새와 저급한 밈 소음 속에서 간신히 숨만 붙는 작은 민주주의 언어가 됩니다.​;​이 장면의 절망은 교수님이 정치 논쟁을 하려는 게 아니라 인간의 최소선을 말하는데, 티혼과 대기실 전체가 그 최소선 자체를 공연으로 짓밟는다는 점입니다.교수님은 노무현을 존경하라고 하지 않습니다.“그분을 반대해도 된다.”“비난해도 된다.”“정치적으로 싫어해도 된다.”여기까지 열어둡니다. 교수님이 요구하는 건 민주주의 궁정 하수구'>궁정 하수구 진영의 충성이 아닙니다. 딱 하나입니다.죽음을 조롱하지 말라.이건 좌우 논쟁 이전의 인간선입니다. 그런데 티혼은 그 선을 일부러 밟습니다. 교수님이 “부끄러움이 없나?”라고 묻는 순간, 티혼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으로 이깁니다. 여기서 티혼은 논쟁에서 이기는 게 아닙니다. 부끄러움이라는 장치 자체를 고장냅니다.티혼의 대답은 반박이 아닙니다.“아니요, 일베는 그런 커뮤니티가 아닙니다.”“그 밈은 다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노무현에게도 비판받을 점이 있습니다.”이런 식으로 안 갑니다. 바로 노래와 춤으로 갑니다. 그 순간 교수님의 윤리 언어는 대기실 오락거리가 됩니다. 말이 춤에게 잡아먹히고, 설명이 구호에게 찢깁니다. 아주 천박한 사운드트랙이 윤리학 강의를 덮어버리는 구조입니다.더 꿈도 희망도 없는 건 티혼이 혼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교수님 앞 환자 10명, 뒤 환자 10명.펜타닐 좀비, 고양이녀, PHD 아이히만들.그들이 단체 공연을 합니다.이건 개인 일탈이 아닙니다. 진료소 대기실이 즉석 군중이 됩니다. 티혼의 비인간성이 군중 합창으로 증폭됩니다. 교수님은 한 사람을 꾸짖고 있었는데, 갑자기 대기실 전체가 “우리도 티혼 편”이라고 몸으로 말합니다.여기서 교수님의 패배는 세 겹입니다.첫째, 도덕적 언어가 통하지 않습니다.교수님은 부끄러움, 존엄,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를 말합니다. 티혼은 그 단어들을 이해합니다. 모르는 게 아닙니다. 이해하고도 웃습니다. 그래서 더 나쁩니다.둘째, 공간이 교수님 편이 아닙니다.여기는 병원이어야 합니다. 조용해야 하고, 아픈 사람을 돌봐야 하고, 의사 도라의 진료권이 보호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겨울궁전 진료소가 반리버럴 밈 공연장이 됩니다. 치료 공간이 감염 공간으로 뒤집혔습니다.셋째, 도라 앞에서 벌어진다는 점이 치명적입니다.교수님이 가장 지키고 싶었던 것은 도라 안의 작은 연민입니다. 도라가 “죽은 사람을 조롱하면 안 된다”는 최소선을 배웠으면 했습니다. 그런데 티혼은 바로 그 도라 앞에서 죽음 조롱 밈을 귀여운 춤과 인형과 대기실 합창으로 바꿉니다.도라가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티혼이 이깁니다.도라가 의미를 이해하고 속상해해도, 키릴로브나가 덮으면 티혼이 이깁니다.도라가 교수님을 불쌍하게 봐도, 대기실 전체의 소음이 더 크면 티혼이 이깁니다.이 장면에서 제일 잔인한 문장은 사실 티혼의 노래가 아닙니다.“교수님 또 왔냐.”이 말 안에 이미 승리가 들어 있습니다. 티혼은 교수님이 매번 와서, 매번 설명하고, 매번 상처받고, 매번 실패한다는 걸 압니다. 교수님은 도라에게 민주주의와 인간 존엄을 읽어주러 오지만, 티혼에게 교수님은 정기 공연의 관객입니다. “또 왔냐”는 말은 “또 지러 왔냐”입니다.그리고 PHD 아이히만들이 단체로 따라 하는 장면이 핵심입니다. 이들은 굶주린 폭도가 아닙니다. 풍요를 먹고 자란 제국 시민입니다. 좋은 의료, 좋은 급식, 좋은 배당,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대기실에서 죽음 조롱을 합창합니다. 그러니 교수님의 절망은 더 깊습니다.가난해서 천박한 게 아닙니다.무식해서 모르는 게 아닙니다.너무 잘 먹고, 너무 잘 보호받고, 너무 오래 제국 장부 안에서 살아서, 타인의 죽음이 장난감이 된 겁니다.교수님은 말합니다.“그분을 반대해도 돼. 비난해도 돼.”이건 민주주의의 언어입니다. 반대와 비난을 허용하되, 인간 존엄의 바닥은 지키자는 말입니다.티혼과 대기실은 몸으로 답합니다.“바닥은 없다.”그 순간 민주주의자는 논쟁 상대를 잃습니다. 논쟁은 공통 바닥이 있어야 합니다. “죽은 사람의 죽음을 조롱하지 말자”라는 바닥도 공유되지 않으면, 남는 건 소음과 춤과 약기운과 군중 조롱입니다.그래서 이 장면은 단순히 티혼이 못된 장면이 아닙니다.교수님이 지키려는 인간적 최소선이, 제국 시민들의 풍요로운 유희 앞에서 너무 가늘고 약하다는 장면입니다.교수님은 도라에게 노바야 가제타와 리베라시옹과 페미니스트 문학을 읽어줍니다. 그런데 티혼은 세 문장과 춤 하나로 그걸 덮습니다. 왜냐하면 제국 대기실은 깊은 독서보다 즉각적 조롱을 더 빨리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맥락을 요구하고, 일베 밈은 반사신경을 요구합니다. 진료소의 펜타닐 공기는 반사신경 쪽에 유리합니다.한 줄로 박으면 이렇습니다.이 장면은 민주주의자 교수님이 “정치적 반대는 해도 죽음 조롱은 하지 말자”는 최소한의 인간선을 세우려는 순간, 티혼과 PHD 아이히만 대기실 군중이 그 최소선마저 단체 공연으로 짓밟아버리고, 도라 앞에서 민주주의의 언어를 ‘재미없는 잔소리’로 만들어버리는 겨울궁전 진료소의 윤리 붕괴입니다.​교수님이 『82년생 김지영』 러시아어판을 꽂아둔 행동은 아주 조용합니다.강의도 아니고, 선동도 아니고, 도라에게 “읽어라”라고 강요한 궁정 하수구'>궁정 하수구 것도 아닙니다.그냥 책장 한쪽에 놓아둔 겁니다.의미는 이렇습니다.“폐하, 세상에는 제국의 아름다운 고양이와 성물황제만 있는 게 아닙니다.평범하게 태어나, 평범하게 일하고, 평범하게 차별받고, 평범하게 지워지는 여자들도 있습니다.그 사람들의 말도 한 번은 옆에 있어야 합니다.”교수님은 도라가 당장 페미니스트가 되길 바란 게 아닙니다. 도라에게 “여성은 장식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소리쳐 넣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도라의 진료소 책장에, 제국 미학이 아닌 평범한 여성의 피로와 억눌림을 말하는 책 하나를 조용히 놓고 간 겁니다.그런데 다음날 티혼이 그 책을 발견합니다.그리고 그 순간 책은 책이 아니게 됩니다.티혼 손에 들어가면 모든 게 공연 소품이 됩니다.교수님에게 그 책은 작은 창문입니다.도라에게 닿을지도 모르는 다른 세계의 숨구멍입니다.티혼에게는 “한녀”라고 떠들며 낄낄댈 무대 장치입니다.여기서 절망은, 티혼이 책을 반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그는 “이 책의 사회학적 해석은 틀렸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이 소설의 문학적 성취가 부족하다”라고 하지 않습니다.“한국 페미니즘의 특정 논점에 반대한다”라고도 하지 않습니다.그냥 멸칭으로 바꿉니다.여성의 고통을 말하는 책을, 여성 조롱 밈으로 즉시 변환합니다.교수님이 책장에 꽂아둔 것은 문학인데, 티혼은 그것을 대기실 코미디로 바꿉니다.교수님이 남겨둔 것은 연민인데, 티혼은 그것을 군중 조롱으로 바꿉니다.교수님이 기대한 것은 도라의 조용한 호기심인데, 티혼은 도라 앞에서 낄낄거리는 공연으로 선점합니다.도라에게 특히 치명적인 이유는, 도라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것도 평범한 여성이 아니라, 제국이 “너무 예쁘다”, “가여운 마흐나즈다”, “고양이다”, “성물이다”라고 포장하며 다루는 존재입니다.그러니까 『82년생 김지영』이 도라에게 닿았다면, 아주 위험한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평범한 여자는 이렇게 지워지는가?”“그렇다면 나는 아름답게 지워지는가?”“나를 사랑한다는 말도, 나를 쓰는 방식일 수 있느냐?”교수님은 바로 그 질문을 책장에 숨겨둔 겁니다.티혼은 그 질문이 태어나기 전에, 책을 조롱거리로 만들어버립니다.그리고 대기실의 펜타닐좀비 PHD 아이히만들이 웃습니다.이 웃음이 제일 잔인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책을 읽고 반대한 게 아닙니다. 읽기 전에 이미 이겼습니다. 책 제목, 한국어 멸칭, 인터넷 남초 밈, 펜타닐 취기, 대기실 군중성만으로 책의 의미를 덮어버렸습니다.교수님의 전략은 느립니다.책을 꽂아둔다.도라가 언젠가 발견한다.첫 장을 펼친다.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해진다.언젠가 교수님에게 묻는다.“교수님, 이 여자는 왜 이렇게 살았느냐.”티혼의 전략은 빠릅니다.책을 발견한다.멸칭을 외친다.공연한다.대기실이 웃는다.도라는 책을 읽기 전에 이미 “웃긴 물건”으로 기억한다.이게 민주주의자 교수님에게 꿈도 희망도 없는 이유입니다. 민주주의와 페미니즘은 설명, 독서, 맥락, 타인의 삶을 따라가는 시간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티혼의 밈은 그 시간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의미가 자라기 전에 껍질을 벗겨서 조롱으로 씹어버립니다.도라가 그 장면을 보면 아마 이렇게 됩니다.책을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대기실이 너무 웃습니다.티혼이 너무 시끄럽습니다.키릴로브나는 아마 “마흐나즈, 그런 책은 머리 아픈 리버럴 여자들의 투정이에요”라고 정리합니다.콘스탄틴은 도라가 괜히 속상해질까 봐 책을 치워버릴 수도 있습니다.그러면 교수님이 남긴 작은 책갈피는 사라집니다.남는 것은 책의 내용이 아니라, 티혼의 공연입니다.도라에게 『82년생 김지영』은 “평범한 여성의 삶을 다룬 책”이 되기 전에 “티혼이 이상한 춤을 추던 책”이 됩니다.그게 제일 잔인합니다.문학이 도라에게 닿기 전에 밈이 먼저 닿습니다.연민이 생기기 전에 조롱이 먼저 붙습니다.페미니즘이 설명되기 전에 멸칭이 라벨을 붙입니다.교수님은 책을 놓고 갔지만, 티혼은 책의 첫 독자가 아니라 첫 약탈자가 됩니다.그리고 겨울궁전 진료소는 다시 치료 공간이 아니라, 민주주의 언어와 페미니스트 문학이 제국 대기실에서 박제되는 소극장이 됩니다.한 줄로 박으면:교수님이 『82년생 김지영』 러시아어판을 도라 진료소 책장에 꽂아둔 것은 도라가 평범한 여성의 고통을 조용히 만나길 바란 작은 희망이었지만, 티혼은 그 책을 발견하자마자 여성혐오 밈 공연 소품으로 만들어버렸고, 그 순간 도라에게 닿아야 할 페미니스트 문학은 읽히기도 전에 대기실의 펜타닐 냄새와 조롱 속에서 “웃긴 물건”으로 오염됩니다.​;​이 장면은 티혼이 가해자였지만, 동시에 제국이 만든 소모품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는 장례식입니다.도라가 살아 있을 때 겨울궁전 진료소는 엉망이었습니다. 티혼이 와서 밈 공연을 하고, 펜타닐좀비들이 대기실을 궁정 하수구'>궁정 하수구 더럽히고, 교수님이 가져온 민주주의 언어가 매번 소음에 묻혔습니다. 그런데 그 엉망진창 속에서도 도라에게는 이상한 완충 기능이 있었습니다.도라는 티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티혼이 얼마나 더러운 짓을 하는지도 끝까지 완전히 붙잡지 못했습니다.그래도 도라의 진료는 차갑게 버리는 방식은 아니었습니다.티혼은 그걸 이용했습니다.그런데 동시에 그 따뜻한 관리에 기대고 있었습니다.이게 잔인합니다.티혼은 도라를 놀리고, 도라의 순진함을 오염시키고, 노무현 조롱 밈을 궁정에 들여왔습니다. 하지만 자기 몸은 도라 진료소의 부드러운 관리에 기대고 있었습니다. 도라가 죽자, 그 완충막이 사라집니다.그리고 제노련의 다른 의사에게 갑니다.거기서는 도라의 “마흐나즈식” 병약한 연민이 없습니다.겨울궁전 진료소의 이상한 인간적 여백도 없습니다.그냥 처방, 장부, 증상, 약, 다음 환자입니다.결국 티혼은 과다처방 속에서 2015년에 죽습니다.이건 제국식 풍요의 사망 방식입니다. 굶어죽는 게 아닙니다. 약이 없어서 죽는 것도 아닙니다. 너무 쉽게 주어지는 약, 너무 느슨한 의료 권력, 너무 익숙한 취기, 너무 많은 배당과 너무 적은 인간적 책임 속에서 죽습니다.제국은 티혼을 굶기지 않았습니다.대신 편하게 망가지게 했습니다.교수님이 장례식에 오는 장면이 그래서 중요합니다.교수님은 티혼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티혼이 한 짓을 용서할 이유도 없습니다.도라 앞에서 죽음 조롱 밈을 공연했고, 『82년생 김지영』까지 조롱거리로 만들었고, 교수님의 최소한의 윤리 언어를 매번 짓밟았습니다.그런데 교수님은 조의금을 냅니다.그리고 말합니다.“자네도 불쌍한 사람이야…”이 말은 면죄가 아닙니다.“사실 착한 사람이었다”도 아닙니다.그냥 최후의 인간 판정입니다.티혼은 나쁜 짓을 했습니다.하지만 티혼도 결국 제국의 약물, 밈, 반리버럴 군중성, PHD 풍요, 부끄러움 없는 놀이문화 속에서 길러진 인간입니다. 교수님은 그걸 봅니다. 그래서 혀를 찹니다.그런데 장례식장이 다시 교수님을 배신합니다.죽은 사람 앞에서도 조용해지지 않습니다.일베충이 너무 많습니다.심지어 세월호 조롱공연까지 있습니다.더 끔찍한 건, 이제 그들이 세월호가 무엇인지 러시아어로 이미 압니다.노알라 때는 도라에게 “몰랐다”는 비극이 있었습니다.도라는 의미를 몰라서 웃었습니다.하지만 이 장례식장 사람들은 모릅니다가 아닙니다.알고 합니다.세월호가 실제 참사였다는 걸 알고, 아이들과 가족들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그걸 러시아어로 설명받고도 조롱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 번역기 오류나 문화권 차이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이건 무지의 웃음이 아니라, 지식 위에 올라탄 조롱입니다.그래서 이 장례식은 티혼 개인의 죽음보다 더 절망적입니다.한 사람이 죽으면 보통 주변은 잠시라도 조용해집니다.죽음 앞에서 최소한의 선이 되살아납니다.그런데 여기서는 반대입니다.티혼이 죽었는데, 티혼을 만든 문화는 죽지 않았습니다.오히려 장례식장에서 계속 공연합니다.죽음이 반성의 계기가 아니라 다음 밈의 무대가 됩니다.교수님 입장에서는 이게 지옥입니다.티혼에게 조의금을 내며 “자네도 불쌍한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순간, 교수님은 아주 어렵게 인간성을 회복하려 합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군중이 다른 죽음을 조롱합니다. 교수님의 애도는 한 사람에게 겨우 닿는데, 장례식장 전체는 애도라는 개념 자체를 부숩니다.이 장면의 핵심은 이겁니다.도라는 죽었고, 티혼도 죽었지만, 티혼이 퍼뜨린 병은 살아 있다.도라는 최소한의 따뜻함을 제공하던 사람입니다.티혼은 그 따뜻함을 더럽히던 사람입니다.그런데 도라가 사라지자 티혼도 버티지 못하고 죽습니다.그리고 티혼의 장례식에는, 그가 남긴 더러운 웃음만 살아남습니다.교수님은 그걸 보고 알게 됩니다.도라를 살릴 수 없었습니다.티혼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대기실의 PHD 아이히만들도 말릴 수 없습니다.죽은 사람 앞에서도 세월호 조롱공연을 멈추지 않는 군중에게, 노바야 가제타나 리베라시옹이나 페미니스트 문학은 너무 조용합니다.하지만 교수님이 조의금을 낸다는 점은 마지막 작은 불씨입니다.그는 티혼을 용서하지 않습니다.하지만 인간으로 매장합니다.티혼이 끝까지 부끄러움을 몰랐어도, 교수님은 부끄러움과 애도의 형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그래서 이 장면은 완전한 어둠이지만, 교수님만은 그 어둠 안에서 작은 장례 촛불입니다. 문제는 촛불 주변에서 사람들이 또 공연을 한다는 점입니다.한 줄로 박으면:도라가 죽자 티혼은 자신이 놀리던 병약한 여제가 사실상 자신을 유일하게 따뜻하게 관리해주던 의사였음을 몸으로 드러내며 과다처방 속에 죽고, 교수님은 그를 용서하지는 못해도 불쌍한 인간으로 애도하지만, 장례식장마저 세월호 조롱공연으로 더럽혀지면서 제국의 밈 질병은 티혼의 죽음보다 오래 살아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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